신원록은 7세에 소학을 배웠는데, 반 권쯤 읽고 나서 말하기를 “사람의 아들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바로 이 책에 있도다.”라 하고, 읽은 것을 실행하고자 날로 힘썼다.
11세에 부친이 중풍에 걸려 치료가 어렵자, 팔공산에 올라가 손수 약초를 캐서 유능한 의원의 조제를 받아 밤낮으로 끓여 올렸다. 부친은 그가 올린 약을 먹고 병세가 조금 호전되었다. 무릇 8년 동안이나 밤을 지새워가며 부친을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계사년(1533) 봄 문득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치르고 여묘 살이 3년에 들어갔다.
신원록은 모친이 90세가 되도록 의복이나 변기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세탁하였고, 똥을 맛보아 증세를 판단하였으며,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등 갖은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같은 해 6월 모친이 93세로 돌아가시자 눈,비를 피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 성묘하였으며, 미음만 마시고 다른 것은 입에 가까이하지 않아 몸이 날로 파리해져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병자년(1576) 3월 신원록은 토사곽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렇게 한 달여를 앓다가 그해 4월 여막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뒤 경인년(1590) 향인들이 신원록의 행적을 적어 고을 수령에게 올리므로 인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계묘년(1600)에 향인들이 다시 글을 올려 을묘년(1615)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아울러 호조참의에 추증되고『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 그의 효행사적이 실리게 되었다.
훈도자리에 나가는 이유
신원록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낙방하자 탄식하기를 “옛 사람들은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데 벼슬을 하지 못하면 불효라 하였다.”하고는 장수현(長水縣) 의 훈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벽 위에 쓰기를 “짐이 무겁고 갈 길이 멀면 땅을 가리지 않고 쉴 것이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녹을 가리지 않고 벼슬해야 한다.”고 하여, 자신이 훈도 자리에 나가는 것이 모두 모친을 위함임을 나타내었다.
조
:
신준정(申俊禎)
생부
:
신수(申壽)
모
:
의흥박씨(義興朴氏) 박자겸(朴自儉)
형제
:
신원복(申元福)
집안 이력
신원록은 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시조는 고려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윤유(允濡)이다. 윤유의 아들 우(祐)는 사헌부장령·전라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공손하며 효성이 매우 독실하였다. 우의 증손자인 석명(錫命)이 처음 의성현 원흥동(元興洞)으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수(壽)로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후학들을 교도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모친은 의흥(義興) 박씨(朴氏) 박자검(朴自儉)의 따님이다.
지극한 효자, 신우(申祐)
신우는 아버지 윤유가 돌아가시자 여묘 살이 3년 동안 읍혈(泣血) 하였다. 그러자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생겼는데,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결과라 생각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고 『고려사』,『삼강행실』,『여지지』에 전한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
신원록이 밤, 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내 병은 하루 아침에 나을 병이 아닌데, 공연히 너로 하여금 독서할 때를 잃게 만들었구나?”라 하였다. 이에 신원록은 부친의 뜻을 어기지 않기 위해 곁에 책을 펴놓고 소리 내지 않고 글을 읽었다고 한다.
형제의 우애
신원록은 기해년(1593) 봄 고향으로 돌아와서 힘써 배우기를 개을리 하지 않았다. 가을 형 신원복과 함께 서울로 시험보러갔다. 합격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이 학질에 걸려 아직 낫지 않았는데, 그는 형을 부축하여 천민천(天民川)에 이르렀다. 마침 가을 물이 불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물엔 독충이 있어 사람을 해치기에 건너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형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넜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화목한 가정
신원록은 계유년(1573) 「연친곡(宴親曲)」을 지어, 매양 좋은 날을 만나면 모친을 모시고 형님과 함께「연친곡」을 노래하면서 잔을 올려 효성[애일(愛日)]의 정성과 형제간[천륜(天倫)]의 즐거움을 다하였다. 그는 자신의 ‘근심스런 생애’의 위안처를 화목한 가정에서 찾고 있다.
「수석구점일절(晬席口占一絶)」
근심스런 생애를 원망하지 말자, 愁裏生涯莫怨嗟, 우리 집의 즐거움은 자랑할 만하나니. 吾門一樂最堪誇. 칠순의 형제가 색동옷을 입고서, 七旬兄弟斑衣處, 백세 된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집 얼마나 될까? 百歲慈親有幾家.
스승
: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 조식(曺植)
향사
:
장대서원(藏待書院)
학파
:
퇴계 학파
집지(執贄)의 예를 행하다
신원록은 계묘년(1543) 겨울,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최초로 죽계(竹溪)에다 서원을 창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선비들이 무수히 모여들자 그도 집지하고 주세붕을 찾아뵈었다. 주세붕이 그를 객례(客禮)로 대우하고 여러 날 머물게 하였다. 또한 주세붕은 신원록에게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한다는 사실과 우리나라 도학의 통서를 말해 주었다고 한다.
기유년(1549)에는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를 찾아 뵙고, 조목, 김팔원 등과 함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머물면서 강론하였다.
지방교화에 힘쓰다
신원록은 장수현(長水縣) 훈도(訓導)로 나아갔을 때, 장수현감 조욱(趙昱)과 함께 해이해진 학규를 새롭게 정하기도 하였다. 기미년(1559) 퇴계를 도산에서 뵙고, 퇴계가 손수 편한 향약을 보고 돌아와서, 이듬해 봄 류희잠(柳希潛)과 의논하여 규약을 정하였다. 또한 원근의 종인(宗人)들과 월삭회(月朔會)를 정하여 매월 초하루 종당(宗堂)에 모여 사당에 참배하여 화목하고 학문을 권하는 뜻을 강(講)하였다.
성리학을 궁구(窮究)하다
갑오년(1534) 돌아가신 부친의 권학(勸學)하신 뜻을 생각하여 예서(禮書)를 읽는 겨를에 사서나 그 밖의 경전을 골라 의리연구를 위주로 독서하였다. 정묘년(1567)에 훈도자리를 버려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80이 넘은 모친을 위해 따로 양로당(養老堂)을 동편 언덕에 지었는데,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탐독하며 지냈다. 이 때 퇴계와 문도들이 문답한 문의(文義)를 모아서『심경』,『근사록』,『주자서』등의 권두에 손수 단락에 따라 중요한 부분을 메모[차록(箚錄)]하여 참고로 삼았다.
회당집(悔堂集)
『회당집』은 의성지방의 효자 신원록(申元祿: 1516~1576)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6세손 정모(正模)가 1740년 편집한 것이 1769년경 간행된 듯하다. 『회당집』은 권두에 이광정(李光庭)의 서문과 6세손 정모가 지은 연보 및 연보발문이 있다.
권1에는 부(賦) 4편과 시(詩) 49수가 있다.
권2에는 서(書) 2편, 잡저(雜著) 6편, 제문 3편 있다.
권3은 효우록(孝友錄), 행장(行狀), 습유(拾遺), 묘지(墓誌), 묘표(墓表),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등이 실려 있다.
권4는 손자 열도(悅道)가 편집한 사우록(師友錄)과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옥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
『논어』의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의 의미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글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善)하지만 이치를 깨닫는 것에는 선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먼저 자각한 사람이 자각하지 못한 사람을 깨우쳐 주고 그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서로 간에 자신이 깨우친 점을 상대에게 보태준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교화되어 그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주세붕은 이 글을 보고 기이하다고 칭찬하였고, 그 말미에 비점(批點)을 치고 말하기를 “나의 서원에 사람이 있어 그 마음이 옥과 같다. 하늘이 장차 그대를 옥처럼 여기시어 그 복록을 베풀어 주시리라.”라 하였다고 한다.